음악은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가?
우리가 음악을 경험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다. 그림이나 조각처럼 공간에 고정된 예술과 달리, 음악은 연주되는 순간에만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음 하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음 음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특성은 음악을 '시간의 예술'로 부르게 만든다. 그런데 과연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사라지는 소리는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음악의 시간성과 존재론은 단지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음악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하고, 해석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이 글에서는 시간과 존재의 관계 속에서 음악을 사유했던 철학자들의 관점을 통해, 음악이 시간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탐구해보려 한다.
시간 속에 있는 음악, 베르그송의 지속(durée)과 음악적 흐름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시간에 대한 기존의 과학적 이해에 도전하며, 양적으로 측정되는 ‘공간화된 시간’이 아닌, 질적인 흐름으로서의 ‘지속(durée)’을 제시했다. 그는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인간의 내적 시간은 연속적이고 유기적이며, 단절 없이 흐르는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음악은 이러한 ‘지속’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예술이다. 우리는 음악을 분절된 음의 집합으로 경험하지 않고, 이전 음의 여운과 다음 음에 대한 기대가 어우러지는 흐름으로 체험한다.
예를 들어, 한 선율이 연주될 때, 우리는 그 선율의 시작과 끝을 ‘순간순간’으로 끊어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의 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유기적 관계, 긴장과 해소, 반복과 변형의 흐름 속에서 음악은 ‘지속’된다. 이 흐름은 시계의 초침처럼 균일하게 분할된 시간이 아니라, 경험의 밀도에 따라 느려지거나 가속되는 시간이다. 음악은 이처럼 ‘의식 안의 지속’을 구현하며, 단절이 아닌 연속성의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음악이 단순한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 그 자체가 음악적이라는 통찰을 제공한다. 음악은 공간적으로 고정될 수 없으며, 점으로 환원될 수 없는 흐름 속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는 음악이 곧 시간의 살아 있는 형식이라는 말과도 같다.
음악의 존재론, 하이데거와 시간-존재의 사유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는 시간이다”라는 테제를 제시하며,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의 구조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시간은 단지 배경이나 흐름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때 음악은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깊이 연결된다. 왜냐하면 음악은 특정한 ‘지금-여기’에 고정되지 않으며, 늘 생성되고 사라지는 현상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공간 속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연주될 때에만 존재하고, 들리는 순간 이미 지나간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음악은 ‘현존재(Dasein)’와의 만남 속에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음악은 듣는 자의 존재, 기대, 회상, 예측, 몰입이라는 시간적 구조를 통해 성립된다. 이는 음악이 단순히 물리적 소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있음'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멜로디를 들을 때 이미 지나간 첫 음을 기억하고, 앞으로 올 음을 예측하며, 지금의 소리에 몰입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음악은 현재(present)에 고정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중첩된 존재의 장으로 펼쳐진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음악은 '현-존재의 시간성' 속에서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음악은 존재의 시간성 자체를 드러내는 예술이며, 단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존재의 실존적 구조를 구현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음악, 소멸의 예술인가? 아도르노와 부정성의 존재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음악을 통해 근대성의 모순과 예술의 진실성을 통찰했던 철학자다. 그는 『음악 사회학 강의』와 『미학 이론』 등에서 음악의 존재방식이 다른 예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 특히 음악은 '기록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는' 예술이며, ‘소멸 속에서만 존재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아도르노가 음악의 존재를 '부정성(Negativität)'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 이유다.
음악은 연주되는 순간부터 사라짐을 향한다. 우리가 듣는 음은 동시에 소멸하고 있으며, 반복은 같지 않다. 어떤 연주도 완전히 동일하게 재현될 수 없으며, 심지어 녹음된 음악조차도 듣는 시간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경험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소멸성 속에서 음악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그는 이를 ‘음악의 부정적 진실성’이라 부르며, 음악은 존재를 직접 말하지 않고, 존재의 부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음악은 사라짐과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아이러니한 예술이다. 동시에 그것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음악은 ‘정태적 존재’가 아니라, ‘운동 속의 존재’이며, 이는 그의 비판적 미학 전체와도 맞닿아 있다. 음악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생성되고 변화하며 사라지는 존재방식이다. 이로써 음악은 시간과 존재의 근본적 조건을 드러내는 비물질적 장(field)이 된다.
시간 안의 존재, 존재 안의 음악
음악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며, 동시에 시간에 의해 그 존재를 드러낸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음악이 공간화된 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흐름임을 보여주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음악이 인간 존재의 시간 구조와 결합된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도르노는 음악의 소멸성과 부정성 속에서 오히려 진정한 존재의 형식을 발견한다.
이러한 사유들은 음악이 단순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열어주는 창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음악은 들리는 것 그 이상이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존재의 한 형식이다. 결국 우리는 음악을 통해 시간의 본질을 사유하고, 존재의 운동성과 일시성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음악은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의 진정한 동반자가 된다.